표적과 기사(奇事)

주님의 부활?


Jesus Never Existed –  Christianity's Fabrication Fa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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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th Humphreys

 


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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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휴일을 맞았다

risen jesus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파숫꾼이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고했다고?”

흠…

 

 

 

 

 

 

 

대주교도 인정한 “가망없는 연대기”

“부활절의 연대기는 가망없는 기획이다. 그리고 전통 간의 모순은 지금도분석중이다…

현재의 상태로는 우리는 지극히 복잡미묘한 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유령 이야기는 없다.

– 윌리암스( Rowan Williams, Archbishop of Canterbury, Resurrection – Interpreting the Easter Gospel, p89, 98.

 

 

 

 

 

 

 

 

부드러운 중심부

“역사상 가장 철저히 입증된 사건” – 혹은 기독교 도넛에 있는 구멍?

기독교 옹호자들은 때때로 다양하고 모순되는 복음서의 증언속에서 부활(론의 맹점 크기)의 구멍이 발견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모순되는 점들은 마치 자동차 충돌사고에 대한 증언들과 같이 진실의 고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보다 더 간단하다 – 이 혼란과 흐리멍텀함의 근저에는 잘 다듬어 지지 않은 허구가 있을 뿐이다.

 

 

 

 

 

 

 

 

 

저것이 새인가? 아니면 비행기인가?

아니다, 그것은 해결 불가능한 신학적 수수께끼다!

예수의 부활한 “육적인, 그러면서도 영적인”신체는 그의 옛 지상에서의 신체에 입었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상처는 육적인 상처였나 아니면 영적 상처였나?

 

 

 

 

 

 

 

 

 

 

 

 

 

 

 

 

 

 

 

 

 

 

 

우리 예수의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다”고 교부 져스틴은 인정한다.


우리는 말씀, 즉 신의 첫 탄생은, 성적 연합 없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우리의 선생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 당신들이 믿는 것은 쥬피터의 아들들에 대해 당신이 보이는 존경심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고 제의한다.

– 순교자 져스틴 Justin Martyr, First Apology, circa 150 AD.


쥬피터의 아들들에는 머큐리(Mercury (세상을 가져온 신) ,아샐레피우스(Asclepius 치유의 신), 그리고 허큘리스(Hercules 처녀탄생을 한 신)가 있다. 이들은 모두 신의 반열에 올라있다.

 

 

 

 

 

 

 

 

 

 

 

 

 

마가복음의 빈약한 종막

“무서워하여 아무에게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시나티커스 성경( Codex Sinaiticus (British Library) ends Mark at 16:8.

긴 끝맺음을 가진 (마가복음)원고들은 많다. – 그렇지만 가장 좋은 4세기 사본 보다 더 앞선 것은 없다.

 

 

 

 

 

 

 

사간이 갈수록 좋아진다

5세기의(성경)필사자는 예수의 대화록에 추가 한다:

“사탄이 권세를 부릴 임기는 끝났다. 그러나 다른 끔찍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

워싱톤니아누스 성경 Codex Washingtonianus – 'Freer Logion', added to Mark after verse 16.14.

 

 

 

 

 

 

 

 

 

 

 

 

 

 

 

 

이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아도니스의 부활

그들은 매년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다. 그리고 온 동네가 비탄에 잠긴 가운데서 그들의 비밀스런 예식을 치른다.

그들이 애도와 울부짖음을 마친 후 그들은 첫번째로 아도니스에게, 죽은 사람에게와 같이, 희생제물을 바친다. 그 후 그들은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서 그의 우상을 하늘로 치켜 올린다.

그들은 또한 마리를 면도로 깍기도 한다. 마치 에집트 사람들이 그들의 아피스 신을 잃었을 때 하듯이”

– 루시안 De dea Syria, 6.

 

 

 

 

 

 

 


 

 

 

냄새나는 이야기

벽돌성경 Brick Testament 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누가복음 5장

부활전의 기적들

“예수는 게네사렛 호수가에 서서 호수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믈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베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시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믈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깊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믈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믈이 찢어지는지라….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세배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 누가복음( 5장.1절-11절)

 

 

 

 

 

 

요한복음 21장

부활 후의 유령사건

“그 후 예수께서 디베랴 바

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배대의 이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가라사대 그믈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믈을 들 수 없더라…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 요한복음( 21장 1절-13절).

 

 

 

 

 

 

 

 

 

 

 

 

 

 

 

“다수로부터의 증거”가 아니라 다수의 다른 모양의 끝맺음!

“1700개의 잔존하는 고대 희랍어 복음서 원고와 그 초기의 번역 중에는 적어도 아홉가지의 다른 마가복음의 끝맺음을 볼 수 있다”.

– 홈즈 Michael W. Holmes, Easter: Exploring the Resurrection of Jesus, (BAR, 2010)

 

 

 

 

 

 

 

 

 

 

 

 

 

 

 

 

 

 

 

 

 

 

happymeal

It takes 611 words to describe the delights of a Happy M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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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기초적 사상은 치유와, 현명한 가르침, 그리고 놀라 자빠질 기적들을 동반한 모든 예수의 소요(逍遙)적 목회활동에 있지 않다. 그보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흔히 “십자가의 약속”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매우 특별한 신파 연극같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더 함축성 있는 경구(警句)로 표현한다면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다”.

따라서 그 적용이 예외 없이 작동하는 가장 확실한 법칙 (즉 자연법칙)- 한번 죽었던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는-을 거스르는 사례를 뒷받침하겠다는 취지로 작성된 성경속의 기술(記述)이 모두 합해서 고작 600단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이것은 “죽음의 극복”이라는 우주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건이 맥도날드 햄버거집의 해피밀 메뉴보다 더 적은 수의 단어로 구성된 증거(?)위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고 있다. *

참으로 말하기 슬픈일이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독립적인, 확증할 수 있는, 이해 관계에 함몰되지 않은, 현대적 관점에서의 설명은, 때때로 그런 주장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사실상) 없다. 진실은 승천한 주님에 대한 증언으로 제시된 것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 책에서 나왔거나 출신이 불분명한 십여명의 인물들로 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복음서는 그 원전(源典)의 형식상 특이한 저작으로서 회람된 것이 확실한 사실이지만 이들은 결코 그 어떤 의미에서건 독립적인 증언들이 아니다. 이것은 특히,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 하나의 공통된 원전에서 유래된 간결한 소문들의 잡다한 모음으로 시작되어, 혼란스럽고 혼동되는 하나의 공통된 전통으로 세워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성적인 마음의 소유자라면 성경이 선전하는 내용상의 제한성과 결점과 모순에 놀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다. 이 믿을 수 없는 주장의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원하는 사람은 믿을 것이다. “신앙”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마가 - 스타 증인

“믿음은 직접적 목격자로부터의 역사적 증언에 기초해 있다.”


사후현신(死後顯身)은 마태, 누가, 그리고 요한 복음에 나온다. 물론 복음서마다 특색있는 화려한 장식들을 가미하고는 있지만 그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는 모두 그 출신이 불분명한 ‘마가’라는 인물로 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마가’가 누구였나에 관계없이 확실하게,그는 예수의 삶에 대해서도, 혹은 죽음에 대해서도, 모두 이를 목격한 증인이 아니다. 교회의 전통에서는 마가가 바울의 옛날 (전도)여행의 동반자였고 로마에 가서 베드로의 증언을 기록했다는 주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 난) 마가 자신의 증거에 따르면 베드로 자신도 그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부분의 사건에 대한 증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세례, 예수에 대한 시험, 수로보니 여인의 딸을 치유한 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 (증인이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십자가 처형 그 자체-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베드로는 목격자로서의 증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자들이 다 예수룰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14장 50절)


베드로가 설상 골고다 주변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베드로가 십자가 옆에서 백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으며,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한 빌라도의 반응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베드로에게 이 모든 일을 알게하려면 우리는 다수의 알려지지 않은 증인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부활후의 현신(顯身)에 대해서도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나 아마도 다른 마라아나 살로메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여자들도 천사로 부터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마태,누가, 그리고 요한은 마가를 표절했고, 마가는 베드로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썼고, 베드로는 마리아로부터, 그리고 마리아는 천사로 부터 들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목격자의 증언이라고 우겨댈 수 있을까?


“봐라 – 무덤이 비어 있잖아!”

“지금 까지 알려져 있는 모든 초기의 복음서들과, 거대 교회나 이단적 집단들 모두, 성 마가를 예수 생애의 역사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원전으로 사용하여 왔다.

– 터너  C. Turner, "The Gospel of Mark", A New Commentary on Holy Scripture, III. p46.

 

마가의 이야기는 굴려진 돌문과 비어있는 무덤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 조차 그가 원조는 아니다.

 

이 생각은 어디서 빌려온 것일까?

세계 최초의 “역사소설”에서 빈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캐레아스는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녁이 가까와 오자 무덤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가까이 다가 갔을 때 그는 돌문이 치워져 있고 입구가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안을 드려다 보고 매우 놀랐다. 그는 밤사이 일어났을 일에 대해 심한 당혹감에 사로 잡혔다. 루모어는 시라큐산에게 이 기적같은 일을 즉각 보고했다. 모두들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헤모크라테스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아무도 감히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한사람을 들여 보냈는데 그는 모든일을 정확히 보고했다.

그것은 믿지 못할 일 같았다.- 죽은 소녀는 그 곳에 없었다. 그가 무덤을 찾아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의 뒤를 떠라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이 망연자실하여 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했다:

수의가 벗겨져 있네요. 이는 필시 도굴범들의 짓인 것 깉습니다. 그런데 시체는 어디에 있나요?”

 – 아프로디시아스의 캐리톤 Chariton of Aphrodisias, Chaereas and Callirhoe, 3.3., 1st century AD.

 

왜 돌문을 치워버려야 했을까?

“굴려서 열려진 돌문” – 극적효과를 위한 장식

“이날, 곧 안식일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한복음 (20장 19절)


복음서는 부활한 예수가 자기 마음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들 가운데서” 갑자기 솟아났다가 사라지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덤에서 나올 때에는 돌문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래야만 했나?

왜 예수는 무덤에서 “텔레포트” (스타트렉에서 처럼)해서 무덤에서 나오고 돌문은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을까? 그렇게 히는 것이 더 인상적이었을 것 아닌가!

이런 변칙은 기독교 신인(神人)이 시연한 사후현신(死後顯身)은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노출시키고 있다. 신은 (무덤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돌문을 치워버릴 필요가 없지만 이야기 꾼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돌문이 무덤입구를 막고 있었다면 누가 그 안에서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있어났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에서 문들이 모두 닫쳐진 방에 나타난 신이나, 디베랴 호수가나, 혹은 갈릴리 산에 나타났다는 신은 확실히 무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돌문을 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연극의 변사에게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열려진 돌문’이라는 극적 장식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무덤을 방문한 여자들(그리고 성경을 읽는 다른 청중들)이 “시신의 증발”을 볼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 역사가 아닌, 연극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어있지 않았던 그 “빈 무덤”!

천사의 증언 – 공허한 허튼 수작

현존하는 최초의 복음서 원고들은-그것이 희랍어, 라틴어, 시리아어, 콥틱어 혹은 아르메니아어 등등 쓰여진 언어에 관계없이 모두- 원래의 마가복음(다른 나머지 세개의 복음서의 기초가 된)이 16장 8절에서 끝났다는 사실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명백히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후세에 첨부된) 9절 부터 20절에 이르는 부활 이야기는 원전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원래의 예수 이야기는 무덤이 전혀 비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빈 무덤” 이상으로 인상적인 것은 없는 채로 끝나고 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 마가복음 (16장 5절)


방문객은 –물론 청중둘도 마찬가지로- 편리하게도 기다리고 있던 천사(흰 옷 입은 청년)로부터 설명을 듣는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이 “젊은 청년”은 성스러운 전언(메세지)을 말로 전한다; “그(예수)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따라서 부활의 첫번째 증인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천사였다. 천사들로부터 (예수가)부활했다는확인을 받은 여자들은 “심히 놀라 떨며” 무덤에서 도망친다.- 첫번째 허튼 수작이 그 다음의 허무맹랑함을 보증하는 식이다.

추측컨대 이 여자들은 (이 일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훈령’를 잊지는 않았겠지만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여자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마가는 어떻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사건’에 (보이는) 순진함이나 그 간결성은 정말 (우리의) 숨을 죽이게 만든다. 있는 그대로 보아서, 마가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정확히 “훠츈 쿠키”(중국 요리집에서 후식으로 주는 싸구려 과자. 과자 안에 점괘나 로또 번호가 찍힌 종이조각이 있다: 역자 주)의 확신 만큼만 신빙성이 있다.

후대의 복음서에서는 이 “목격자”로부터의 증언을 (좀 더 실감있게) 개선 시킬 것이며, 뻔한 지적사항들에 대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이야기기 좀 더 실감있게 된다 (아니면 그 반대가 될라나?)

예수 자신이 출두하다

“처음에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가 승천했다고 믿었다; 그 후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그의 출현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전통속에 삽입되었다.”

– 웰스 G. Wells, The Historical Evidence for Jesus, p44.


마태복음의 저자는 마가로 부터 전래된 최소주의적(minimalistic)인 이야기속에 극적요소를 가했다; 눈에 띄는 것이 부활한 예수의 “첫 현신(顯身)”이다.

마태는 먼저 마가복음에는 없는. -혹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으- ‘파숫꾼’을 도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파숫꾼은 , 실상, 부활 그 자체보다 더 주목의 대상이 된다!

마태는 극적 효과를 위한 마무리로서 -그가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도 활용했던 것, 즉 지진을 도입한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 마태복음(28장 2절) – Matthew 28.2.


여기서 마태는 돌문을 열은 어떤 존재가 천사라고 말해 주므로서 마가가 남겨놓은 수수께끼를 풀어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도 여성 방문객들은 “놀라고 있지만 큰 기쁨에 차서” 제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말해줄 수 있었다 (28장 8절) 그래서 마태는 어떻게 이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마가가 남겨놓은 (이야기 속의) 변칙적 처리를 제거하고 있다.

마태는 천사의 증언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될 그 어떤 것을 원했다. 그래서 마태는 달려가는 여인들의 행로에 예수가 직접 출현하도록 한다(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역다 주). 그러나 마태는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 넣지는 않았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단지 마가복음에서 천사가 했던 말을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천하는 구원자의 발을 끌어 안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나…” 마태복음 (28장 9절)


이제는 예수가 직접 자신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였으며 갈릴리로 가라는 동일한 지침까지 내렸으니 천사의 역활이 완전히 중복된 셈이 되어 전체 글이 읽기에 거북하게 되었다!

이런 극적인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이 수수께끼의 파숫꾼은 여자들 보다 더욱 놀라고 있다! “무서워 떨며 죽은 서람과 같이 되었다”(28장 4절)고 마태는 말하고 있다. 마태는 이 심한 충격을 받은 겁쟁이들에게 주의를 돌려 이들을 소위 “소문”을 시작하는 말미로 사용한다. 기독교인들이 “도둑맞은 시신” 의 위증(僞證) 이후 이 방책의 유용성을 발견해 내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그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태복음(28장 11절-15절) Matthew 28.11-15.


이 삽화(揷話) 전체는, 만일 시신이 무덤에 없다면 누군가가 그 시신을 치워버리지 않았겠느냐는 뻔한 설명에 그 주의를 돌리고 있다. 파숫꾼의 설정은 ‘도굴’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파숫꾼을 왜 ‘죽은 사람 처럼’ 만들어야 했을까? 이 대단한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증인을 설정해 주는 것이 좀 더 유용하지는 않았을까? 그 정확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사건이 실제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 성전 파숫꾼 대원들의 증언이 이후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연쇄적 사건들의 발단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서 이 대목은 문제투성이다. 도대체 혼수상태의 파숫꾼이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은 자신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확신하며 말할 수 있을까? (보고 받는 사람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이런 보고를 그냥 받겠는가: 역자 주) 마태는 이미 27장 64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와 가진 회합에서 오고 간 대화로서 모종의 계책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지만 마태복음의 저자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꾸며낸 비열한 계책을 어떻게 알 수 있었나 하는 점은 더 설명하기 어렵다. 너무도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점은 마태가 그러한 회합이 안식일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는 완곡어법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가장 작은 문제들에 불과하다. 예수가 3일후에 부활한다는 예언을 했을 때 유대인 대제사장들은 그 예언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 하고 있었던 반면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전혀 모른 채 있었다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유대 지도자들이 파숫꾼들로부터 천사, 및 부활의 이야기를 보고 받았을 때 그 보고를 실제로 믿고 이를 덮어두기 위해 많은 돈으로 파숫꾼들을 매수했다고 가정을 하려는가?!

마태는 그의 이야기를 갈릴리에 있는 산에 이른 열한명과 약속된 예수의 출현을 언급함으로서 끝마치고 있다. 이 시점에서도 어떤 이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예수는 어쨋든 “가서 모든 족속들은 제자로 삼으라”며 그들을 파송한다.

 

믿을 만한 증언?

무덤에 몇명의 여자가 있었나?

넷 혹은 그 이상?

누가복음(24장10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 것을 사도에게 고하니라.

셋?

마가복음( 16장 1절)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라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 두었다가…."

둘?

마태복음(28장 1절)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하나?

요한복음(20장 1절)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떼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아무도 없었다!

고린도 전서(15장 4절-8절)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누가 또한 부활을 강화시키기 위해 자신만 의 험담을 더하고 있다

주님과의 한담(閑談)

누가 또한 마가의 원전을 가지고 작업을 했지만 파숫꾼이나 지진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작하는 장면에 간단한 변화를 줌으로서 실감을 더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사람의 천사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남자로 바뀐다. 누가는 어쩔줄 모르고 있는 여인들의 면전에서 이 사람들을 홀연히 나타나게 함으로서 이 사람들이 사실상 천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천사들이 (일제히) 전한 메세지는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는 것으로 마가와 동일하다 – 그러나 여기서는 천사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막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적 발언을 여인들에게 상기시킨다.(아마도 그들이 이 말을 잊어버렸다고 상상하시라).

이 순종하는 여인들은 가서 “열 한 명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누가는 이 여인들에 대하여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승일로에 있는 ‘스타’ 베드로는 이 여인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충격을 받고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기이히’여긴다.

누가는 이제 이 ‘부활의 전통’에 자신의 중요한 공헌-엠마오의 만남-을 끼워 넣는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모든 보고서중 가장 자세한 내용으로, 20절이나 된다! Emmaus

요상하게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골길 산책’ 이라고 할만한 이 삽화(揷話)에서 두사람의 증인은 모두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 중 한사람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제자가 아니란 사실이다.- 열 한 명은 이 이야기에서 후에 등장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이 이야기 이후에 게속된 부분보다 후세에 작성되어 삽입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누가는 ‘글로바’라는 사람과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다른 사람 둘이 엠마오(이 촌읍은 그 위치가 너무나도 확실치 않아 9개의 장소에서 그 ‘영광’을 얻기 위해 경쟁이 붙었다고 한다)로 가는 도중 부활한 예수를 만났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누가의 예수는 이 ‘바보들’에게 선지자를 불신하는 것에 대해 강의를 한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느니라” 누가복음 (25절-27절)


이는 –부활의 순전한 경이로움 보다-성경의 예언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 귀절의 목적이 다분히 교훈적인 데에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고 있다. 

도대체 시체가 살아난 일을 겪고 난 사람들에게 어느 누가 그 일을 믿기 위해 성경적 보증이 필요하겠는가?

그 주된 목적은 아무 증거 없이 성경을 믿으라는 강요에 있다. 이 삽화(揷話)는 성찬식을 취하는 동작으로 끝이 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예수는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가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 그 즉시 우리의 영웅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나타났지만” 이는 단순한 유령이 아니다!

마가 와 마태는 예수가 “앞서 가서” 갈릴리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지만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결정한다. 여기서 누가의 주된 관심사는 부활한 예수가 단순한 혼령이 아닌 살과 피를 가진 진정한 육신이라는 것을 확립하는 데 있다.

“엠마오의 두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 했지만 모인 사람들 모두가 확인을 하게되어 이 두사람은 할 일이 없어진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4절)


아무런 자세한 뒷바침 없이 주어진 이 ‘증언’은 사후현신(死後顯身)의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가장 슬픈 장면이라 할만하다.

이 (엠마오의) 두사람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게속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예수 자신이 그들가운데 서시니”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번에는 상당한 숫자의 군중들( 열 한 명의 제자와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 그리고 이미 살아나신 주님을 보았던 세 사람) 앞에서 – 예수는 그들의 의구심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한다 – 그런데 그들은 이미 주님이 살아나셨다고 이구동성으로 선포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의심이 이렇게 깊을 수가 있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38절, 39절)


누가는 핵심을 차근차근 알아 듣도록 설명한다. 여기 물리적 존재(단순히 옛날 식의 영혼의 존재가 아닌. 그런일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가 있다. 누가의 예수는 만져보라는 부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찾기도 한다. 여기 모였던 사람들은 그에게 구운 생선 한 토막과 (후세의 원고에 보면) 꿀벌집(이것은 한글판에는 나오지 않는다: 역자 주)을 대접한다. 여기서 생선은 다분히 상징적인 면이 있다: 예루살렘은 바다나 큰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꿀벌집은 교회가 신임사제(司祭)에게 그들의 첫 성만찬에서 꿀벌집을 주는 관행이 채택된 이후에 이 귀절에 삽입되었다.

누가의 예수는 여기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기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정적인 교훈을 말한다. 그래서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고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세 전파하도록 위임한다.

누가는 예수, 혹은 그 제자들이 갈릴리의 산길을 어슬렁 거렸다는 식의 시사는 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제자들이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에 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이런 조항을 두지 않았다. 아마도 누가는 이미 그의 속편에 대한 초고를 써 두고 첫 오순절 사건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는 베다니 근처에서 아무런 꾸밈없는 예수의 승천 장면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승천 중에 비행하고 있던 돼지를 앞질러서)

 

요한이 도입한 무덤으로 “달리기 경주”

걸어 가세 믿음위에 서서,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요한은 마가의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라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돌문이 열린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 함으로서 마가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따라서 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여인들은 생략하고 “해가 막 뜰 무렵”이라고 하는 대신 “아직 어두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마리아는 향품을 예비하지 않고 있다.

이상하게도 요한은 마리아가 열린 무덤을 들여다 보지도 않고 달려가 베드로에게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보고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누가는 베드로 홀로 무덤으로 달려간 것으로 했지만 요한은 베드로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제자가 마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기도 하는 것처럼 달리기 경주를 하도록 한다. 이 ‘다른 제자’란 용어는 수수께끼다. 이는 요한복음에 유일하게 나오는 용어로 요한 복음에서 여러번 사용되고 있다. 특히 유명한 귀절은 20장 2절에 나오는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이다. 이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는 21장 20절에서 만찬장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한”자로 밝혀진다. 전통적으로는 이 사람이 야고보의 형제 사도 요한일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이름을 밝히지 않나? “예수의 사람하는 제자”는 겸손한 절제의 별명이 아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그 이유는 다른 복음서들에서 요한이란 이름이 관여된 그 어떤 사건들도(댜략 20개 정도) 이 네번째 복음서에서는 나오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사건들 가운데는 산 정상에서의 변형(마태 17장 2절, 마가 9장 2절)과 야이로의 딸을 살려낸(마가 5장 22절, 누가복음 8장 41절)것과 같은 극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런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만일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복음서를 실제로 썼다면 이런 사건들을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다른 제자”가 달리기 경주에서 이겼으나 멈춰섰고 베드로를 먼저 무덤에 들어가게 한다. 무덤에 들어간 베드로는 버려진 세마포들을 보았다 (한 조각으로 된 튜린의 수의와 일치시켜 보라. 그리고 당시 예수는 벌거벗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다른 제자”도 무덤에 들어간다.

의미심장하게도, 예수는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이 “다른 제자”는 ‘보고 믿는다”. 반면에 자신의 모든 말과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예언되어있다는 예수 자신이 남긴 반복적인 교시에도 불구하고 “저희”(열 한 제자?)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한다”.

빈 무덤만 보고도 곧장 믿은 이 “다른 제자”는 그의 순진한 믿음으로 예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해독자(解讀者)이거나, 독자, 혹은 청중이 될 수는 없을까?

 

오고 가는 사람들

수수께끼 무덤가의 혼잡한 시간들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홀로 남아 다시 한번 무덤으로 간다. 울면서 무덤안을 들여다 보는데 그녀는 여기서 하나도 아닌 두 천사를 본다.

왜, 사람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천사는 조금 일찍 나타나서 베드로 일행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면 이 지극히 고지식한 연극의 극적효과를 반감시키게 될까?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마리아는 이 천상의 방문객을 보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다른 복음서에서와는 반대로) (왜 울고 있느냐는)그들의 질문에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해서”라고 대답한다.

열려있는 무덤이나, 천사가 와 있는 것이나, 버려져 있는 세마포나, 예수자신의 예언, 그리고 성경에 적혀 있는 예언, 등등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 맹추같은 여자는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제발 부탁하건대, 이 여자는 도대체 더이상 얼마나 많은 증거가 필요한 것일까?

이 시점에서 이야기는 또 한번 소극적(笑劇的) 요소를 가미한다. 예수가 그녀에게 왜 우느냐고 묻느다. 그는 몰라서 묻나? 그는 방금 천사가 했던 같은 질문에 이 여자가 대답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나? 그런데 이제는 마리아가 바보 노릇을 할 차례다. 그녀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시신을 다른 곳(혹시 퇴비더미 위로?)으로 옮긴 장본인으로 생각하고 시신을 자신이 처리하겠노라고 제안한다 (이 여자가 제법 힘 깨나 썼던 모양이다!)

이 주문(呪文)은 예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깨지지만 예수는 ‘나를 만지지 말라”는 경고를 내린다. 이 이상한 지시는 마태복음에서 다리를 깜싸 안았다는 이야기와 누가 복음에서 ‘만져보라”는 부탁까지 했다는 이야기와는 매우 상반된다. 이 “만지지 말라”는 지시는 특히 이상한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다음의 절에서 요한은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살아난 예수는 특별히 도마에게 자신이 입은 상처를 만져보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예수가 “만지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이유는 그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 인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일 그가 ‘이미 아버지께로 올라갔다”면 마리아는 당연히 그를 만질 수 없었을 것이니 이 말은 좀 바보 같이 보인다. 어쨋거나 마리아는 지시 받은 대로 그가 “아버지께 올라간다”고 형제들에게 알린다.

아마도 초기 원고에서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거의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누가의 주해서(혹은 컨닝페에퍼)에서 따 온 “그들 가운데 나나나셨다”는 이야기로 이야기가 게속된다. 그런데, 예수는 방금 그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는 농담을 했던 모양이다!

예수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하며 그의 상처를 보여준다. 그런데 다른 공관복음서(마가, 마태, 누가: 역자 주)에서와는 달리 “다리”가 “옆구리”로 바뀌었다; 요한은 로마 병정과 그의 창에 대한 이야기를 도입한 유일한 복음서 저자다. 요한의 부활한 예수는 성경의 예언을 충족시킨다는 식의 혀짤배기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시며” 성령을 불어 넣어 준다.

이 사람들에게는 오순절 다락방의 불꽃같은 유령들을 위해 지연시킬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마태나 누가복음에서와 같이 주님은 사제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파송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죄를 용서하거나 혹은 안하거나”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한다.

 

그 자리에 없던 도마는 증거를 원한다

보지 않고 믿기: 즉 맹신(盲信)

또 다른 끝맺음이 있을 것 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열 한 명이 아니라 열 이었다. 도마는 아마도 다른 곳에 더 바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의심많은 사람들의 분신으로 그려져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이야기는 그 지방의 기독교 이야기 꾼의 말을 고집스럽게 의심하는 회의론자들로부터 강한 역풍을 만난다.

도마는 비이성적이지 않게 지신의 눈으로 보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하니라” (25절)


친절하게도 예수는 여드레 후 이 문들이 닫힌 방으로 나타난다. 명백하게 그는 도마의 의심을 엿듣게 되었거나 도마의 의심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의심자(疑心者)에게 자신의 상처자국을 만져보게 한다 -그상처자국은 이 신삥 신체 (아니면 재생품?)에도 상처자국이 있는지 호기심을 발동하게 한다. 그런데 부주의 스럽게도 예수는 바로 10여절 앞에서 자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는 경고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신체는 어떤 종류일까? 진짜 물리적(혹은 육적)인 신체로서 걷고, 말하고, 먹기도 하지만 마음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신체인가? 새로운 영적신체 (영혼이 아닌)는 옛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있나? 물론 이것은 별 의미가 없는 수작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해결되지 않은 신학적 수수께끼의 몽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마침내 급소를 찌르는 문구와 함께 그의 훈계를 마친다: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20장 27절, 29절)


다시 말하면 경신(輕信)은 “축복”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다. 목사들에게 편리하겠다!

 


“낚시질 하러 간다” –또다른 종막?

요한 (복음)의 전통에는 자체적인 수수께끼가 있다. 원래 20장 30절로 끝난 것이었으나 갈릴리의 세번째 유령(혹은 네번째?)의 “고기잡이 이야기”가 덧붙여 졌다. "fishy story".

요한복음의 21장은 사실 분실된 마가복음의 끝부분일지도 모른다. “진품”마가복음은 부활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재회할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끝난다. 요한복음 21장은 정확히 이 재회장면을 담고 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16장 7절,8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니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한복음(21장 1절-4절)


이야기의 흐름이 훨씬 순조로울 뿐 아니라, 여자들이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있던 정황이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언어학적으로나 주제상의 요점들은 마가복음의 끝부분과 요한복음21장을 연속해서 접합시키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암시한다.(고기잡이, 그믈,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지시 등을 참조) 확실히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첫 등장으로 이 이야기를 설정하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세번째 등장으로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보인다.

이 이야기가 초기의 마가복음에서 좀 더 적절한 끝부분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또 다른 암시는 누가의 부활 전의 기적(5장 1절-11절)에 나오는 비범한 어부와, 요한복음 21장의 부활 후 유령간의 밀접한 관계이다. 두 이야기 모두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누가는 유독 이 부분에서만 “시몬 베드로”란 이중이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요한은 이 이름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 (실제로 16번) 원래 마가가 쓰여지는 단계에서 –첫번째 사도의 부름에 대한 마가의 보고로 부터 개발된 이 이야기는- 누가에 의해 십자가 형 이후가 아닌 이전의 경이스러운 사건으로 바뀌어 복사된 것이다. 이 후의 과정에서 요한은 자신의 저작에 쓰기 위해 (이 이야기를) 절취한 후 사후(즉 십자가 처형 후: 역자 주)의 조우로 그 목적을 바꾼다.

자, 그런데 왜 근사한 이야기를 낭비하는가!

 

다시 마가로 돌아가서 – 이 몽상에 대한 조화작업

마태,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의 저자들은 모두 마가의 원본에 있는 매우 빈약한 이야기로 부터 ‘빈 무덤’의 이야기를 개발했다. 후세의 편집자들은 이들을 조화시킬 필요성에서 부활에 대한 추가적 소재들의 요약본을 마가복음의 끝에 덧붙였다. 우리는 현재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까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3.39.)에서 마가복음의 전파에 아리숀(Aristion) 이라는 장로가 끼친 역활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10세기의 한 아르메니아 MS는 그 부분을 파피아스(Papias)가 언급한 적이 있는 아리숀(Aristion)이란 장로로 부터 기인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Peake's Commentary, p818).

여인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진퇴양난을 해결하기 위해 마가복음의 확장본(16장 9절, 10절)에서는 “이른 아침” (2절에서 이미 나온)을 다시 내 세우고 막달라 마리아(10소절 전에 언급된)를 재 등장시키고 그녀를 어수선한 세세한 설명 없이 부활한 예수를 본 첫번째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마가복음(16장 9절 10절)


이 이야기는 누가의 ‘엠마오’이야기의 축약판(12절 13절)이 뒤 따른다. 그리고 열 한 명의 만찬 (14절)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누가복음에서 따와 줄여 놓은 것이고 “의심 많은 도마”에 대한 힌트는 요한복음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에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을 막을 때에 에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 16장 12절-14절)


이 아리숀(Aristion)의 편리한(?)작품을 대신할 선택은 소위 ‘짧은 종막’판이다 (예를 들면 Codex Bobiensis):

“그 여자들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가서 그들이 들은 모든 것을 간추려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을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보내시어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을 전하게 하였다 아멘” (1982년판 공동번역)


이 허풍스런 이야기의 대단원을 장식할 승천의 직전에 17절과 18절에서 예수는 믿는 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고, 병든 사람을 고치라는 분부를 내린다. 많은 전도사들이 이 허무맹랑한 수작의 “신빙성”을 매우 시끄럽게 방어하면서도 사려 깊게도 주님을 시험해 보려 하지는 않는다.

귀신을 쫓는 행위는 병의 원인에 대하여 무식했던 시절에는 흔히 하는 일이었다. “뱀을 다루는 일”은 아마도 말타()에서 바울이 행한 엉뚱한 짓에 대한 완곡한 인용일 것이다. Malta.

이레나이우스(Irenaeus)가 그의 저작 이단에 대항하여(Against Heresies (3.10.5))에서 끝에서 두번째 절을 인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승천”은 마가복음에 2세기 말에 첨부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날조된 허무맹랑”의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가는가?

여기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신에 대한 성스러운 문서들이 그저 우연히 되는 대로, 그리고 안건 중심의 방법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원시 기독교 공동사회에서는 구원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천당으로 승천했다는 신앙을 유지하는데에 ‘믿음’ 하나만으로 충분 하였다. 이 신앙을 양육하기 위한 첫번째 자양분은 (빌려온) 간단한 ‘빈 무덤’의 이야기였다. 여기에는 아무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무덤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실상 처음에는 이 무덤은 죽음의 비유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개종자들의 확신이 흔들리고 “비유적 진실”과 “실 세계의 진실” 간의 구별이 애매해 지면서 원래의 “희생” 이야기에, 처음에는 천사의 입을 통해, 그리고 후에는 구원자 자신의 입을 통한 환상과 증언 등과 같은 군더더기 장식들을 더하도록 권장되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회의론자들로부터의 공박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 되었다. 버려진 세마포와 같은 소품들이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부활한 주님”의 선포는 충성자들이 의심자들에 대하여 취해야 할 반응을 시연한다.


오늘날의 성경 옹호자들은 “성경은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는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저속한 궤변속으로 퇴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속임수는 무심결한 탐구자나 아니면 유약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나 속일 수 있을 뿐이다. “부활”의 총체적 구성은 가장 연약한 끈에 매달려 있다. 이성의 바람으로 단순히 한번 훅 불기만 해도 이 영광스러운 허튼 수작은 먼지 구데기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Sources:
Robert Price, Jeffery Jay Lowder, The Empty Tomb: Jesus Beyond The Grave (Prometheus 2005)
Craig Blomberg, The Historical Reliability of the Gospels (IVP, 2008)
Gary Habermas, M. Licona, The Case for the Resurrection of Jesus (Kregel, 2004)
Rowan Williams, Resurrection, Interpreting the Easter Gospel (Darton Longman Todd, 2003)
Daniel Clark, Dead or Alive? (IVP, 2007)
John Wenham, Easter Enigma (Wipf & Stock, 2005)
Frank Morrison, Who Moved the Stone? (Faber & Faber, 1975)
N. Anderson, Jesus Christ, The Witness of History (IVP, 1985)
John Austin Baker, Evidence for the Resurrection (Christian Evidence Society,1988)
John Young, David Wilkinson, The Case Against Christ (Hodder & Stoughto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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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a Jewish father (stern patriarch) and a Christian mother (obsession with guilt and heaven) it is not surprising that Islam grew up a bit of a tartar.
Islam's Desert Storm – 'Christendom' Reaps a Whirlwind

Heaven help us. The richest, most powerful nation in history has a psychotic infatuation with Jay-a-sus the Lawd!
The Christianizing of the Ameri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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