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도시
복음서는 예수의 고향이 나사렛(Nazareth') ('polis Natzoree')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이 마리아라. (누가복음 1장 26절, 27절)
(Luke1.26,27)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틀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누가 복음 2장 3절,4절)
(Luke 2.3,4)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22절, 23절)
(Matthew 2.22,23)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아기가 자라서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누가 복음 2장 39절, 40절)
(Luke 2.39,40)
복음서는 우리에게 나사렛이란 도시(혹은 읍, 마을?)에 대하여 별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 –그 곳에 유대회당(시나거그)은 있었는지, 혹은 적대적인 군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지 (예수의 그 유명한 ‘선지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배처당한다’는 인용문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면 그 곳에 절벽이 있었는지 등등-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허무맹랑한 책에 따르면 ‘나사렛’ 이란 도시는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놀랍고도 놀랍게도 우리가 이 신(神)의 고향에 대하여 역사적 고증을 추구해 보면, 그 어떤 역사적 자료에서도 1세기 이전에 나사렛이란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구약에는 단 한군데에도 나사렛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여호수아 19장 10절이하 16절 까지에는 스블론(Zebulon)지파 사람들이 이 지방에 정착하는 과정이 기술되어있다. 이 기록에는 12개의 읍촌(邑村)들과 6개의 마을 이름들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탈무드에는 갈릴리 지방의 63개 촌읍(村邑)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란 이름은 없다. 혹은 그 어느 랍비들의 문헌에도 나사렛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바울 조차도 나사렛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랍비 솔리(Solly)의 편지(진본이나 날조된 가짜 모두)에는 예수의 이름이 221번이나 언급되고 있지만 나사렛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고대의 그 어느 역사가나 지리학자들도 나사렛에 대한 언급을 한 사례가 없다. 이 지명은 4세기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사렛’이란 )지명은 들어본 바가 없다
-요세프스
그의 역사책에서 요세프스는 갈릴리 지방 (약900평방마일의 면적)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남겨놓았다. 서기 60년의 1차 유대 전쟁에서 요세프스는 이 작은 지역을 구석구석 다니며 군사작전을 폈었다. 요세프스는 그의 저서에서 갈릴리 지역의 45개 도시와 촌락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중에 나사렛은 없다.
그렇지만 요세프스는 자신이 한동안 살았던, (현재의) 나사렛에서 1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야파(Japha (Yafa, Japhia))라는 도시에 대하여는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지역의 지형을 보면 (현재의)나사렛은 골짜기의 한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삼면이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골짜기의 자연적인 접근로는 서남방향이다.
유대 전쟁 이전에는 이 야파라는 도시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다. 우리는 이 도시에 초기형태의 유대회당(시나거그)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회당은 서기 67년에 로마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Revue Biblique 1921, 434f) 주민들은 모두 전쟁중에 학살당했다(Wars 3, 7.31). 요세프스는 당시 15,000명의 주민이 트라얀(Trajan)의 군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2,130명의 생존자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한동안 번성했던 이 도시는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멸살되었다.
자, 그러면 이 1세기의 야파 주민들은 그들 중 죽은자들을 어디에 매장했을까? 바로 골짜기 좀 더 윗쪽의 묘지가 있는 지역이였다.
아 야파시가 완전히 파괴되므로서 이 지역(현재의 나사렛지역)을 매장장으로 쓰는 일도 끝났다. 이 무명의 공동묘지는 지금은 현대적 도시 나사렛의 지하에 놓여있다.
후세에 이 지역(현재의 나사렛)은, 도기 파편들이나 그 밖에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아래를 참조) 다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서기 135년의 바 코히바(Bar Kochba)반란 이후로, 당시에는 유대지방으로부터 갈릴리 지방으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이동이 있었다. 영세한 규모의 농업에 기초한 작은 마을이 생겨났지만 이 지역을 묘지로 사용했던 야파시 사람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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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모든 사실들은, 만일 우리가 이 지역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교도의 도시 세포리스(Sepphoris)의 유적에서와 같이 1세기의 목욕탕, 빌라, 극장 등등의 유적들을 보며 거닐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유적은 전혀 없다!
이 유적은 나사렛이 아니고 (현재의) 나사렛에서 45마일 떨어진 세포리스(Sepphoris (Diocaesarea))란 도시의 유적이다. -복음서에는 이 도시에 대한 언급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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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기독교 옹호론자들은 기를 쓰고 설명한다: “에 .. 당연히 나사렛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정말 아주 작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식으로 ‘어의적’ 축소를 하다보면 시(市)는 읍(邑)이 되고 읍(邑)은 리(里)가 되며 리(里)는 이름없는 작은 부락이 돌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이름없는 부락에 대하여 말하다 보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은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선지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당한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최소한 이 신인(神人)이 불경죄를 저지를 만한 유대회당(시나거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지극히 작은 전원적인 촌락에 유대 회당이 어디 있었나? 왜 이런 사실이 헬레나(Helena)(아래 참조)와 같은 초기의 순례자들에게 명백하게 보이지 않았을까-무엇보다도 그녀의 영웅에게는 이것이(즉 회당이) 우물보다 훨씬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현실적으로 이런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성서 두루말이를 보관할 수 있는 교회건물은 물론이고, 자기네들 만을 위한 성서 두루말이를 갖출 수 있는 재원이 없었을 것이다. 시골 농부들로서 이들은 한사람 한사람 모두 문맹들이었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총 25가구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하고–이 근친혼이 성행했을 300명이 채 못될 씨족 사회에서-그의 첫 30년 생애를 보냈다면, 그의 불경스러운 언행에 충격을 받았었을 다수의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을 그 다수의 사람들은, 적대감을 가진 낮선 사람들이 아닌, 그와 함께 성장한, 그의 친형제를 포함한 그의 친척들이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그들은 수년동안 그의 경건스런 언설(言說)들을 들어왔을 것이다 .
더구나 만일 이 선택받은 처녀가 천사로 부터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는 ‘성수태 고지’ 를 받았다는 것이 ‘정말’이라면 10분 거리안에 살고 있는 모든 씨족들이 이 일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다짐하지만, 열두살 배기가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포했다는 ‘예루살렘 사건’에 대하여도 이들 모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베틀레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별과, 현자들과, 목동들과, 유아 학살, 등등을 모두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왜 그들은 이 신인(神人)의 언어와 행동 그 어느 것에도 격분했을까? 그들은 그들 중에 신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던가? 그리고 (유아 예수가 받았다는) 금으로 만든 선물들은 어떻게 됐나-이 선물로 이 성가족(聖家族)은 부자가 되지 않았나?
만일 나사렛이 갈릴리 언덕의 잊혀진, 정말로 지극히 작은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사렛 예수’란 호칭은 (이 호칭을 들은 사람들로부터) ‘어디 사는 예수?’ 라고 하는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예상대로 (기독교)옹호론자들의 요한복음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1장 46절) 인용구는 질문자 나다나엘이 정말로 이 사라져가는 작은 마을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나다나엘은 가나(Cana) 지방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 지역 밖의 사람들 중 나사렛 이라는 지명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다시 한번, 만일 나사렛이 정말로 매우 작은 촌락이었다면, 이 신인(神人)이 뛰어내릴 수 있는 절벽이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편리한(?) 산은 10리(4 Km) 밖에 있는데 석회석의 울퉁불퉁한 바위를 올라가야 하니 오르려면 상당히 힘이 들었을 것이다. 이 수퍼맨이 정말로 개구리 뜀뛰로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그들 가운데를 지나서’ 도피할 수 있었을까?(누가 복음 4장 28절 30절 참조)
물론 이런 부조화가 생기게 된 이유는 이 ‘예루살렘 사건’(누가 복음 2장)과 전체 예수탄생 이야기 같은 것들이 상주(常住)하고 있던 메시아 이야기속에 후세에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은 마을이라도 정말 있었을까?
고고학적인 증거?
(현재의) 나사렛 지역의 발굴작업을 수행한 사람들이 캐톨릭 고고학자 였다는 사실은 정말로 (우리에게는) 축복받은 일이다. 더 이른 시대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산”이라고 산뜻하게 이름이 써 있는 샌달(짚신 모양의 신발)이라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들은 그들이 발견했다는 별 볼일 없는 유물들로부터 그 어떤 신성함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람들 조차도 예수시대 이전에 나사렛 지역에 마을이 있었다는 가설에 대한 총체적 증거부족을 감출 수가 없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실상,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머물러 있었고, 그들은 1342년 클레멘트 6세 교황이 내린 두개의 칙령, 'Gratias agimus' 와 'Nuper charissimae'의 결과로 ‘신성한 땅’의 공식적 관리자 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 나사렛은 여러번 주인이 바뀌었다. 한때(1099)에는 놀만-시실리안 모험가 탄크레드(Tancred) 가 ‘갈릴리 공국’을 세우고 나사렛을 그 수도로 했었다. 그렇지만 기독교도들은 지속적으로 퇴출되었고 마침내 1263년 나사렛은 이슬람 군주 바이바스(Baibars)에 의해서 완전히 유린되었다. 그리고 이 전 지역은 황폐한 상태로 400년간 버려진 채로 남아있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람들은 1620년 레바논의 족장 화크 아드-딘 2세(Fakhr ad-Din II)와의 협정하에 이 지역에 다시 들어왔다. 그들은 십자군 요새의 유적을 다시 점령했지만 희랍 승려들이 아직 ‘마리아의 우물’을 그들의 소유물로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금이 흘러들어오자 그들은 시정부를 접수하였고 1730년에 석굴(Grotto) 상부에 교회를 건축했다. 1955년 이 구조물을 헐어버리므로서 고고학 전문가들에게 발굴작업의 길이 열렸고, 바로 이 교회의 마당에서 성서상의 나사렛을 ‘발견’할 길이 열렸었다!
기독교 영웅 1호. 1955년 부터 1960사이의 발굴작업은 벨라미노 바가티(Bellarmino Bagatti) 신부 (Flagellation, Jerusalem 에 있는 Studium Biblicum Franciscanum교수)에 의해 수행되었다. 바로 자신의 교회 밑과 그 주변의 토지에서 바기티는 수 많은 동굴과 공동(空洞)을 발견했다. 이 동굴들 중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 매우 자주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대부분은 무덤이었고 많은 무덤들이 청동기 시대의 것들이었다. 다른 것들은 수조(水槽)나, 큰 기름통, 혹은 곡식저장고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다. 명백하게도 나사렛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로 있다가 하세모니안(Hasmonean)시대에 ‘재 창건’ 되었다는 여러 정황이 보였다. 그렇지만2세기 전의 것들로부터 나온 고고학적 증거는 모두 장례품들이었다. 바가티는 이 지역이 주거지 였다는 적당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세기 때 나사렛에 몇 십 가구 정도가 정착해 살았던 작은 농촌 마을 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앙적 충동으로 인한 대 비약을 한 나머지, 이 편파적 발굴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이 바로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의 마을’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그들이 발견한 것이 전혀 마을이 아니었고 또 그 어떤 개인에 대한 증거도 전혀 없다는 것이 확실했지만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실상 그들이 발견한 것들은 일관되게 (이 지역이) 고립된 원예농장 이었거나, 더 확실한 가능성은 (이 지역이) 오랫동안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캐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편리하게도 (여기서 발견된) 참으로 의심스러운 낙서에는 이 성지가 그 누구도 아닌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고 써 있었다!
그렇지만 한가지 피할 도리가 없는 사실이 있다: 유대인들이 죽은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불결함에 대한 성벽(性癖)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묘지 근처에 마을을 세우거나 반대로 마을 근처에 묘지를 두지 않는다. 묘지는 그 어느 마을에서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동구밖에 있어야 했다.
바가티가 발견한 묘지들이나 더 초기의 발굴작업에서 알려진 것들이나 모두 마을의 동구밖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묘지)들은 우리에게 마을의 경계선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바가티( Bagatti (1.28)) 나 휘네간( Finegan (27))이 작성한 지도상의 위치를 보면 우리는 그 마을이 얼마나 작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크로산(
–J.D.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그러나 이 ’마을’의 존재론을 포기하기 전까지 우리는 마을의 크기를 얼마나 줄여서 잡아 볼 수 있을까? 이 석굴('grotto', 바가티의 교회를 말함: 역자 주)근처에서 발견된 돌을 깍아 만든 무덤들의 존재는 1세기 당시 이 지역에는 마을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이 지역은 (사람의 흔적이 있어) 사용된 흔적은 있지만 거주지역은 아니었다.
기독교 영웅 2호: 1996년부터 1997년간에 환 박사(프란시스칸 신학교)는 나사렛 지역을 발굴했다. 1996년 11월 초기 기독교 연구 센터의 스테펜 환 박사는 나사렛 병원의 농업 단지(段地) 지역에 대한 조사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환 박사팀이 발굴해 낸 것은 단순히 ‘옛날 것’이라고 매우 애매모호하게 연대가 매겨진 와인프레스였다. 이 단지(段地)의 표면에서 초기와 후기의 로마시대 등 여러시대로 그 연대가 잡혀진 질그릇 조각들도 발견되었다.
이 나사렛 병원 부근의 땅 표면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97년 2월 부터 5월 까지 모두 초기 기독교 연구센터에 소속된 환 박사와 그의 팀에 의해 시행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단지(段地)의 형태에 따라 두 개의 독특한 지역이 인지되었다.
전형적인 기독교적 열정에 따라 환 박사는 나사렛이 “둘 혹은 셋정도의 씨족들로 구성된, 약 35가구가 2.5 헥타르의 지역에 흩어져 살던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은 이 가택들에 대한 모든 증거들이 후세의 침입자들에 의해서 완전하게 멸실되었다는 점이다.
진실은 (그러나) 이 빈약한 증거가 이 지역이 수 세기에 걸쳐 단일 가족의 농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가설)에 일관한다는 것이다.-그리고 단일 가족의 한 가구가 마을이 되지는 않는다.
마이클 아비-요나(Michael Avi-Yona)h의 1962년 카사리아(Caesarea) 발굴작업.
역사와 고고학이 실제로 일치하게 된 것은1962년 8월 가사리아(Caesarea Maritima)의 한 유대회당(시나거그)에서 진한 회색의 대리석 조각이 발견됨으로서 시작되었다. 대략 3세기 후기 혹은 4세기 초기로 연대가 잡힌 이 대리석 조각에는 비 기독교적 문헌으로는 처음으로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언급되어 있었다. 이 문헌에는 나사렛이 갈릴리에 속한 지역으로 유대아의 성직자 가족들이 135년의 비참한 하드리안 전쟁(Hadrianic war)후 이주해 간 지역으로 나온다. (흔히) 이런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피하여 정착한다. 따라서 근처의 (이방인의 도시인) 세포리스(Sepphoris)는 (이들의)고려 밖이었을 것이다. 명백히 성직자들은 옛날부터 매주 번갈아 성전 봉사를 하는 24개의 ‘코스’로 나뉘어 있다. 복원된 문헌에 새겨진 글은 다음과 같다:
'하비즈(Hapizzez)라 하는열 여덟번째 성직자 ‘코스’가 나사렛에 [재 정착하다]”
– 크로산
– J.D.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소수의 성직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4세기 까지 이 골짜기의 동남쪽에 작은 정착지를 만들었다. 그들이 (근처에 있는) 엣날 공동묘지를 확장하고 재 활용 했을 가능성은 참으로 높다. 그 후 이 유대인의 촌락은 이 보다 더 북쪽의 ‘마리아의 우물’가 까지 기독교인들이 출몰하면서 밀려났을 것이다.
우리는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水源)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기독교인들이 불신자 유대인들을 쫒아 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래서 기독교가 공인된 후 4세기 어느 때, 희랍 승려들에 의한 이 2세기의 유대회당(시나거그) –지금은 ‘시나거그 교회’로 알려진-의 접수가 허용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 장소에서 마을이 번성함에 따라, 아마도 가버나움에서와 같이 기초골조가 없이 건축되었던 옛날 유대인들의 주택들은 허물어지거나 방기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후 일부 유대인들이 이 골짜기에 재정착 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7세기에 페르샤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이 지역에서 다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얻게되다.
실제로 ‘나사렛 예수’란 표현은 희랍어 원전의 표현인 'Jesous o Nazoraios'의 잘못된 번역이다. 더 정확히 하려면 우리는 ‘예수 나사렌’으로 해야 한다. 여기서 ‘나사렌’은 지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 말이 어떻게 작은 마을에 적용되게 됐을까? 이 매우 애매모호한 히브리 말의 어근은NZR 이다.
2세기 영지주의 복음서인 빌립의 복음서(Gospel of Philip)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들에게 온 사도들은 그를 그리스도 예수 나사렌이라고 불렀다…”나사라(Nazara”)는 “진리”다. 그래서 ‘나사렌(Nazarene)’은 진리의 사람이다’
– 빌립의 복음서(Gospel of Philip, 47.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나사렌(Nazarene)은 원래 유대 기독교의 한 교파인 엣센(Essenes) 종파중의 한 분파의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사렛이라는 도시와 하등의 특별한 관계가 없다. 그들의 이름의 어근은 ‘진리’ 였거나 혹은 히브리어의 명사인 넷서('netser' ('netzor'))로 그 뜻은 (나무)’가지’ 혹은 ‘꽃’이다. ‘넷서’(Netzor)의 복수형은 ‘넷서림’(Netzoreem)이다. 바울의 저작에는 ‘넷서림’(Netzoreem)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다. 1세기 말에 유대인들이 매일 올리는 기도에 이 이단종파에 대한 저주가 들어가면서 ‘나서림’(Nazorim)이 나타난다.
매일 세번식 그들은 기도한다: “신이여 나사렌(Nazarenes)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 에피파니우스 Epiphanius
(Panarion 29.9.2).
‘나사렌’들은 자신들을 ‘이새’(전설적 유대왕인 다윗위 아버지)를 시조로 하는 한 분파로 보았을 것이다. 확실하게 그들은 그들만의 복음서로서 초기판(版)의 ‘마태복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잊혀진 원문, -‘나사렌 복음서’- 를 나사렛 거주민을 위한 복음서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언’을 들먹이며 ‘예수 나사렌’이라는 직함이 어떻게든 나사렛(지역)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속임수를 시작한것은 후기판(版)의 마태복음 이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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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2.23.
마태복음은 예수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를이 귀절로 마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잘못 인용하고 있다.-그는 확실히 유태인 예언서 그 어디에도 ‘나사렛’을 들먹인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약에서 소위 예언을 (이 부분은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한 것은 나사라이트(Nazarite, 나실인)의 등장이다. 예를 들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말라.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됨이라. 그가 불레셋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 사사기 13장 5절
Judges 13.5.
마태는 간교하게도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교체했다. 나실인 (머리를 길게 기르고 신에게 봉사하기로 맹서한 사람)을 ‘(어디어디)의 주민’이라는 뜻을 시사하는 단어로 교체해 놓음으로서 그의 허구적 영웅이 고향 마을과 연계되도록 날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마을이 어떻게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유대인 기독교의 관련 지파인 노서림(Nozerim)과 함께 에보님(Evyonim),-가난한 자들 (후에 에비오나이트로(Ebionites) 불림)-이 거의 동시에 생겨났다.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Bishop of Salamis , Cyprus, circa 370 AD))에 따르면 이들은 나사렌(Nazarenes) 내부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원래 집단과는 바울을 거부하는 점에서 교리가 달랐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공경하는 유태인’ 들이었다. 이들 또한 그들만의 마태복음의 원형-히브리인들의 복음서-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종파는 자신들을 ‘성약(聖約, 신과의 계약)의 수호자’, 히브리어로 Nozrei haBrit로 불렀는데, 이것이 Nosrim 혹은 Nazarene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교회의 내부분열로 원래의 나사렌 교파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유태교의 일반적 교의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재 정비하려는 구룹('Evyonim'-Nosrim)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교를 철저히 거부하는 구룹('Christian'-Nosrim)이다.
자, 우리는 135년의(위의 언급 참조) 바 코히바(Bar Kochbar)전쟁에 패한 후 일부 성직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사렛 계곡지역에 재정착했다는 사실을 안다. 거의 확실히 이들은 에보님-노스림(Evyonim-Nosrim) 들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마을을 ‘나사렛(Nazareth)’ 혹은 ‘가난한 자의 마을’로 이름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들에 대한 연민에서 혹은 그들의 교리상 가난을 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복음 5장3절
마태복음의 필자(마태복음 원형 이야기의 재필자)는 성직자 가족들이 그들이 ‘나사렛’이라고 부르는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로 정착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웅의 고향의 이름을 이 새 마을의 이름을 도용해서 짓기로 작정했던 모양이다.
속임수 이야기, 속임수 지리(地理)학
복음서의 원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린시절 이야기나 유년기 혹은 초기 청년기 시절의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것을 자제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태양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심적인 주제의 전개에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싶이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커지게 마련이다. 특히 수십년이 지나가면서 약속되었던 구세주와 심판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마가복음을 다시 고쳐 쓴 필자는 아마도 140년과 150년 사이에 그의 원문을 개정(改正) 하는 과정에서 제 1장에서 단 한번 이 도시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와서 …”
– 마가복음 I장 9절
그후 이 지명은 (마가복음에서: 역자 주) 거의 잊혀졌다. 우리는 마가복음에 보이는 (이 지명에 대한) 네번의 언급은 모두 후세에 삽입된 것으로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연이어 누가복음에서 나사렛이 어떻게 부상(浮上)되고 있지 추적해 볼 수 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나사렛의 연관성을 강조한 저자다. 누가는 그의 반 가버나움(anti-Capernaum)적인 입장을 천명한 저자다. 학자들은 누가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누가는 ‘통상적으로 유대인 적인 것’들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지리에 대하여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그 지역의 지리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었고 그의 작은 극본에서 그는 불가능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기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 누가복음 4장29절.
나사렛은 실상 완만한 언덕으로 싸여있는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전 구역은 평야지대거나 아니면 급한 절벽이나 뾰족한 봉우리가 없는 완만한 산언덕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지형은 정확히 말하면 고분지이고 그 중 한 방향으로는 지고(地高)가 낮은 에스드랠론(Esdraelon)평야이다. 그러나 나사렛이 산 위가 아닌 계곡에 건설되었다는 데에는 아무런 가장이 없다. 중세 때의 마을들 조차도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산 정상이 아닌 정상의 아래에 건설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57년이 되어서야 'Nazerat Illit' ('Upper Nazareth')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의 교외가 이 도시의 동편 언덕위에 건설되었다.
전경
(뾰족한 건물 밑): 1세기때의 나사렛市의 위치로 추정되고 있는 곳 |
배경과 오른쪽:
절벽의 산
(일명 ‘주님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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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다수의 무리가 예수를 이 경사면 아래로 굴려버리겠다고 정말로 위협했을까? |
시내 중심가의 유대회당(시나거그)으로부터 와서 산을 기어올라 절벽의 꼭대기 까지 오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부엉이 바위가 있었으면 참 편리했을 것이다! 역시 우리나라 좋은나라:역자주) |
신학이 건설해낸 촌읍(村邑)
3세기의 교부인 오리겐(Origen)은 나사렛에 대한 복음서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당시 현재의 나사렛으로부터 단 3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카세리아(Caesarea)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그 곳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 확실한 생각이 없었다! 오리겐이 살았던 시대에서 이미 교회가 점차 조직화 됨에 따라 카세리아와 예루살렘의 주교들간에 벌써부터 극심한 경쟁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 경쟁관계는 451년 캘세돈(Chalcedon)에서 (예루살렘 편에 유리하게) 해소되었다. 경쟁의 주 요인은 성지의 관리권에 있었다. 따라서 잊혀진 도시 나사렛을 찾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그 해결책을 찾아 헤메이는 과정에서 4세기 초에, 80세의 과부 헬레나(Helena) 여제(女帝)가 나타난다. 자신을 창조해 낸 창조자와의 시급한 만남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그녀는 ‘신의 일’ (Works)이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팔레스타인 지방을 향하여 양심의 순화를 위한 순례의 길에 나섰다. ‘나사렛’ 지역에서 그녀는 아주 오래 된 우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상 이 우물은 이 근방의 유일한 수원(水源)이었다. (이 사실 만으로도 여기에 도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된다). 의심할 바 없이 약삭빠른 지방사람들의 꼬임에 빠져, 헬레나는 신속하게 이 땅바닥에 있는 구멍을 ‘마리아의 우물’로 명명하고 그 자리에 소규모의 바실리카(옛 로마시대의 장방형의 회당:역자 주)를 건축하도록 명한다. 참으로 편리하게도 복음서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 수태 고지를 위하여) 마리아를 찾았을 때 그녀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우물 현장은 성령이 임했던 곳으로서 지역적 후원을 얻게 되었고 나사렛은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헬레나는 지속적으로 번창하는 성 순례 여행사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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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우물’: 땅바닥에 있는 한 구멍으로 성 가족에 대한 증거( 빈 무덤 만큼이나 확신이 가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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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의 순레 코스 길-여기에 나사렛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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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nerarium
Burdigalense – 보도(Bordeaux)의 한 무명의 순례자가 남긴 여행일정-이 것은 어느 경건한 여행자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다. 이 기록의 연대는 333년이다. 이 여행기록은 로마식의 도시들과 이 도시들간의 거리를 표시한 목록이며 간간히 이 도시들에 대한 논평을 싣고 있다.
이 순례자가 Jezreel (Stradela)을 지날 때 그는 아합(Ahab)왕과 골리앗(Goliath)을 언급했다. Aser (Teyasir) 에 도착해서는 그는 욥(Job)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Neopolis 에서 그가 떠 올린 것들은Gerizim산과 아브라함과 요셉 그리고 Sichar (예수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했다는 곳)에 있었다는 야곱의 우물이다. 그는 다시Bethel (Beitin) 마을을 지나갔고 야곱이 신과 씨름을 했다는 것과 Jeroboam 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게속한다.
이 순례자는 -신약이야기 보다는 구약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나머지- ‘나사렛’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
이 과부 여제가 여행을 다녀간 몇 세대 후에 또 다른 늙은 대공(大公), 에제리아(Lady Egeria)공녀(?)가 이 ‘매일매일 더욱 성스러워지는 땅’에서 수년을 보냈다.
에제리아(Egeria)-당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나 대부분의 황실 측근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여자였는데- 그녀는 383년에 나사렛 지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약삭빠른 승려들이 ‘매우 크고 장려하게 보이는 동굴들’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이 동굴들이야 말로 바로 성모 마리아가 살던 곳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 동굴의 관리자들은 우물의 관리자들과의 경쟁을 의식하여 우물이 아닌 이 동굴이 바로 성령이 임했던 곳이라고 우겨댔다. 이 소위 ‘그로토’ (석굴)는 또 다른 순레자들의 인기거리가 되었고 570년에는 또 다른 교회의 바실리카가 여기에 세워졌다. 오늘날에는 바로 이 장엄한 그로토의 지상과 그 부근일대에 중동지방에서 가장 큰 기독교 테마공원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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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태 고지 (Annunciation)바실리카의 지하에 있는 그로토(석굴). 성모 마리아의 처녀(?)때의 집 (혹은 원한다면 성 가족(聖 家族)의 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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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말, 이 때에는 교회가 신학적 코렉트네스(correctness; political correctness 에 대응한 말: 역자 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제롬(Jerome (Onom. 141:3))은 나사렛이 ‘갈릴리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태리에서의 추문을 피하여 이 지역에 유복한 로마인들을 위한 수양관을 차리려고 도망을 쳤다. 이 마을은 이미 반세기 전에 황실의 여행지가 되었던 덕분에 존속할 수 있었다.
5세기가 되어서는 -단지 두개의 교회로 특징지워진- 이 나사렛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경건한(그리고 여가가 있는) 순례자들의 주요 도착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570년에Piacenza 가 이곳을 방문했고 638년에는 Arculf, 724년에는 Wilhebald, 943년에는Al Mas'udi, 그리고 1102년에는 Sewulf 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기의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성수태 고지 교회(annunciation church)를 보았다는 보고가 있을 뿐이다.
636년에 아랍군은 나사렛이 속해 있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던 비잔틴군을 패퇴시켰다. 기독교인들은 게속해서 이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많은 제약과 과중한 세금을 감수하여야 했다. 그 후 5세기가 지난 후 십자군이 이 계곡을 점령하고 요새를 건설하였다. 초기의 ‘그로토’ 교회의 기초위에 그들은 좀 더 장대한 것, 그들의 상주(常住) 비숍에 걸맞는 것을 건축하엿다.
나사렛 고도(古都)-교회적 테마 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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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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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중심부에는 수많은 동굴위에 세워진 거대한 ‘성 수태 고지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중동지방에서 가장 큰 교회)
언덕위에는 다른 동굴위에 세워진 성 요셉교회가 있다. (목수의 집과 작업장)
길 건너편에는 굴려낼 수 있는 거대한 바위문이 달린 고대 무덤위에 지어진 나사렛 수녀원 숙박소가 있다.
U길 윗편으로는 초기 유대회당(시나거그)옆으로 희랍정교 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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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백만이 넘는 여행객들(이스라엘 방문자의 50%)가 나사렛을 찾는다. 누가 파티를 망치길 원하겠는가? 그리니 조용히 있을 수 밖에…
1세기에 나사렛이란 촌읍(村邑)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문헌적 증거도, 고고학적 증거도, 그리고 역사적 중거도, 모두 없다. 그것은 단지 상상의 신인(神人)을 위한 상상의 도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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